<줌인 2004년 6월호>
외관 너머에 존재하는 곳, '달성공원'을 찾은 사진가
육영혜 기자
마임을 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임의 세계에 들어서야 한다. 음성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몸짓과 표정 만으로 표현하는 연기인 마임을 한 걸음 물러서 그저 관망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움직임일 뿐이다. 마임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에 동참하게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를 수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진의 세계는 어떠한가? 사진을 보고 이해하려면 사진의 세계와 사진을 찍은 사진가의 세계에 들어서야 하지 않을까?
소리 없이 이미지로 표현되는 사진은 자칫 그 외관 만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외관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면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사진가 이주형은 외관 너머에 존재하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차분하게 담아내고자 한다.
그가 찾은 곳 <달성공원>
달성공원은 대구 시내에 위치한 공원이다. 서울이 연고지인 그에게 있어 달성공원은 그저 대구에 있는 공원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어느 기획전시에 참가하게 되면서 인연을 맺게 된 달성공원은 그에게 있어 처음엔 몹시 낯선 곳이었다. 위치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그곳을 찾아나서기 위해 정보를 모으기 시작하면서 단순히 공원으로 여겼던 그곳, 달성공원이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곳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달성공원이 역사가 담긴 곳임을 알고있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저 적당한 시기에 만들어진 공원이려니, 그곳을 찾으면 동물원이 있고,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쉼터가 있는 그런 곳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달성공원은 대구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원래 대구의 옛 부족국가였던 달구벌의 토성 '달성'은 사적 제62호로 261년, 우리나라 성곽 발달 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축성된 성곽으로 '달성공원'이라는 이름도 바로 그 토성에서 유래한다. 공원 곳곳에는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의 동상과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민족시인 이상화의 시비 등 대구를 대표하는 큰 인물들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여러차례 역사의 흐름과 함께 증축되어 온 달성공원은 근세 도시 발달과 더불어 1900년대 초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1960년대 후반 본격적인 공원조성과 함께 현재의 동물원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기억의 환기
사진가 이주형은 여러 자료를 통해 습득한 정보들을 엮어가며 달성공원의 이미지를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가 달성공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느낌은 역사적인 의미들을 잠시 묻어둔 채 어린 시절 추억을 샘솟게 하는 공원의 모습이었다. 잘 가꾸어진 화단과 넓게 펼쳐진 잔디밭, 울창한 나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동물원의 주인공들, 이 모두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이끌고 혹은 소풍을 나섰던 공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공원은 일상의 생활공간이 아니에요. 오랜 시간 머무르면서 생활하는 곳이 아니라 겨쳐 가는 곳이죠." 달성공원에 대한 그의 이야기다.
언젠가 사진가 자신도 거쳐 온 공원, 굳이 이곳 달성공원이 아니라 할지라도 공원이 건네주는 그 풋풋하고 따스한 느낌은 잊혀지지 않고 다시금 샘솟아난다. 과거의 기억을 머금고 현실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그는 생각했다고 한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공원의 모습이 진실일까? 아님 지금 서 있는 이곳의 모습이 진실인 걸까? 기억 속에 남겨진 그 모습들이 너무나 생생해서 기억과 현실의 경계를 의심해 보는 것이다.
기억의 장면과 현실의 장면의 일치에서 비롯되는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증거물이 필요했던 것일까? 사진가는 공원 구석구석을 거닐며 기억의 생생함을 의심하게 하는 광경들 앞에 카메라를 세운다.
어린 시절 유난히 커 보였던 큰 덩치의 코끼리가 선사하는 재롱에 구경꾼들을 즐거워했다. 과자를 손에 쥐고 코끼리의 코가 잽싸게 낚아 가는 순간을 기다리며 마음 설레 했다. 이제는 예전만큼 코끼리가 커보이지 않을 어른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눈앞의 코끼리는 큰 덩치의 재롱둥이이다.
무거운 카메라를 목에 매달고 기념사진 찍기를 권유하던 아저씨의 모습도 여전하다. 값을 치르고 어색한 웃음과 자세로 찍던 기념사진은 공원에서의 모든 추억을 한 장의 사진으로 함축하여 시간이 흐른 뒤 앨범을 펼쳐 사진을 들여다볼 때면 그 모든 순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추억상자이다. 이제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카메라인지라 사진사 아저씨의 역할이 잠잠하지만 공원 안 아저씨의 존재는 추억을 따라 공원을 찾은 이들을 위한 배려처럼 느껴진다.
장소의 역사성을 찾아
사진가는 발길이 머물고 시선이 멈추는 곳에서 이런저런 기억 속 장면과 현실의 장면을 엮어간다. 크지 않은 공간 이곳, 달성공원에서 오랜 세월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지금은 나무숲에 가려져 토성의 형태는 간과되기 쉽고, 공원 곳곳에 자리 잡은 기념비와 동상들이 의미를 상실한 듯 보이지만 분명 이곳은 다양한 시대를 거친 사람들의 저마다의 기억과 추억이 담겨져 있고, 사진가가 망문한 이 시점도 축적되어진 바로 역사가 새겨진 곳이다. 달성공원에서 사진가는 시간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교차되는 순간을 경험했다 한다.
그는 '달성공원' 촬영을 시점으로 기억과 더불어 역사의 관점에서 장소에 접근하게 되었고, 이후 근대의 흔적들을 제시하고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는 '세트장'에서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장소의 역사성을 찾아나설 것이라고 한다.
평일 늦은 오후부터 해질 무렵 공원을 거닐며 담아낸 사진들은 이 시간대의 광선이 주는 부드러움과 핀홀카메라의 아련한 분위기, 그리고 폴라로이드 필름에서 흘러내린 유제의 흔적으로 인해 기억의 환기를 도모해준다.
사진가 이주형은 우연히 인연을 맺은 이곳 '달성공원'에서 나라와 도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보고, 민족과 세대, 그리고 본인을 비록산 각 개인들의 기억을 되짚어보며 외관 너머에 존재하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담아 기억과 역사가 어우러진 사진의 세계를 들어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