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컬처 2003년 3월호>
저 아련한 기억의 풍경들 | Young Artist
이경률 | 사진평론가
언제나 그렇듯 어떤 작가가 나에게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면, 우선 난 사진을 만든 작가의 개인적인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진 그 자체의 독립된 메시지로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의미 분석은 오늘날 우리가 오랫동안 잘못 길들려진 이미지 읽기의 가장 큰 오류이기도 하다. 정 반대로 난 언제나 사진을 그 사진이 있게 한 어떤 원인적인 것(생성)을 지시하는 지표로 본다. 그래서 난 이 작가가 왜 이러한 이미지를 찍었을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이미지의 결과보다 오히려 그 원인성을 이해하려 한다.
언제나 그렇듯 또한 난 사진을 해석하지 않는다. 단지 거기서 저절로 회상되는 나의 경험적인 인상을 포착하려 할뿐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보는 순간 응시자의 것이지, 결코 다른 사람이 숨겨 놓은 암호해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누구나 공통된 상징적 매개물이라 할지라도 사진은 근본적으로 응시자의 욕구와 경향을 무한대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수신신호로 간주된다.
보여주는 사진과 환기시키는 사진
사진은 단순히 대상을 그대로 복사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시각적 재현 기술을 요구하는 그림과는 달리 누구나 쉽게 찍을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예술 영역에서 이러한 복사적 기능으로 활용되는 사진은 사실상 극히 드물다. 우리가 대상이나 상황으로부터 경험하는 어떤 개인적인 느낌이나 인상을 재현하려 할 때, 사진은 그때 그 어떤 매체보다도 다루기 어려운 매체가 된다. 왜냐하면 그림과는 달리 사진에서 작가가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있는 행위는 파인더 안에 들어온 대상의 선택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진만이 가지는 유일한 개념적 특수성 즉 반박할 수 없는 과거 사실의 출현(ça a été)인 동시에 표현 도구로서 사진을 가장 빈약한 재현 매체로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결과적으로 작가의 의도가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작가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사진이 외시하는 이미지(탈-코드)에 숨겨놓는 사진적 장치를 실행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진적 장치에 있어 크게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있다. 하나는 어떤 구체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작가의 제스처이고 또 다른 방식은 무엇을 환기시키기 위한 사진적 행위를 들 수 있다. 예컨대 잡지기사와 시(詩)는 문맥 구조상 거의 같은 단어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 구성과 읽기에서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언어화합으로 되어 있다. 잡지 기사는 단어 하나 하나의 나열에서 언제나 의미의 분명한 진술을 중심으로 이해된다. 반대로 시는 결코 단어의 단순한 조합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시는 조합된 단어의 의미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이 끝난 후 느끼는 공허함과 같은 끈적거리는 무엇을 발산시킨다. 바로 거기에 애절한 시인의 노래가 읊어지는 것이다.
같은 방법에서 볼 때, 다큐멘터리 사진과 순수사진 역시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거의 같은 물리적 진행(광학적)으로 인해 시각적으로 읽는 방법이나 과정은 동일하다. 그러나 유일하게 다른 점은 작가의 재현 방식과 보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보여준다"라는 것에 몰두하는 작가인 반면, 순수 사진가는 무엇을 “환기시키기를" 원하는 사진가이다. 사실상 위대한 사진가의 작품은 언제나 특별한 효과 없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 또한 환기하기에 충분한 그런 작품이 아닌가 ?
사진으로 쓰는 시인의 노래
작가 이주형이 사실상 거의 같은 주제로 보여준 일련의 사진 시리즈들 기억 풍경 시리즈(1999), 침묵의 여행 시리즈(1994) 등]은 뭐라고 정확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공통적으로 과거에 잃어버린 무엇을 은닉한 사진적 지표들 즉 “누설하는 사진들"이다. 그의 사진들은 흔히 다른 작가들이 거의 정형화된 목소리로 증언하는 지칭하는 사진, 보여주는 사진 또는 전달하는 사진이 아니라, 사진을 응시하는 각자에게 무엇을 환기시키는 사진이다. 바로 거기에 사진의 위대한 힘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주형의 사진은 시간의 흐름에 사라지는 사건의 시간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딜 봐도 푼크툼 하나 없는 밋밋한 무시간의 무광에 있게 된다. 거기서 작동하는 “표현적 움직임(Le movement d'expression)"은 응시자 각자가 가지는 거대한 기억의 침수뿐이다.
작가 이주형이 노래하는 사진적 언어는 공통된 문화적 실행에서 그가 살아온 경험과 사는 방식의 인덱스(지표)일 뿐이다. 그때 사진은 “보이는 것을 보라"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보라"라고 말하면서, 애석함과 아쉬움, 후회와 욕구 혹은 무의식의 충동과 같은 작가의 경험적인 발산을 슬며시 관객 자신의 경험이 만드는 레미니센스로 나타나게 한다. 그의 사진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어떤 좋은 반사 이미지와 설명 불가능한 어떤 감(感)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상, 그것들은 아마도 바로 이러한 사진적 발산이 야기 시키는 것들이다.
결국 그는 사진으로 시인의 노래를 쓰는 작가이다. 은유적이든 환유적이든 여하간 거기서 화합되는 무언의 메시지는 찍혀진 대상이 아닌 찍혀진 주제에서 야기된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언제나 결코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무의미(non sens)에 있다. 사진이 표명하는 것, 그것은 감각에 의한 비구체적인 추상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구조적인 것을 집어치우고 근본화 되고 추상화 된 형이상학적인 것, 다시 말해 우리의 경험과 일상에서 비록 형태는 알 수 없지만 그 존재를 무형으로 감지할 수 있는 “내재적 형상들(감각의 시뮬라크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