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예술 2006년 3월호>
이주형, 독특한 색깔의 사려 깊은 사진가
진동선 | 사진평론가
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 한국사진은 이전에 비해 학문적 토양들이 현격히 비옥해진 새로운 토양과 만나게 된다. 바로 그 초석이 사진이론에 대한 열정적 탐구이다. 이곳저곳 대학원에 사진전공이 새롭게 개설된다. 그러나 심도 깊은 사진이론 교육에 대한 갈증과 욕구가 분출되면서 학교 교육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학생들, 또 제대로 한번 사진을 가르쳐보자는 탄탄한 이론으로 무장된 젊은 교육자들이 이곳저곳에서 사진공방을 만들기 시작한다.
1987년 홍대 근처에 “포토셀(Photo Cell)”이라는 사진 공방이 있었다. 서교아파트와 국민은행 사이길로 홍대 전철역을 향하다 보면 서교동 성당과 서교초등학교로 갈리는 사거리 좌측 흰색 건물 2층에 포토셀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6평 남짓 공간에 전체가 코닥 노란색으로 칠해진 그런대로 아늑하고 아담한 공부방의 모습이었다. 포토셀의 운영자는 나였다. 그때 나는 홍대 대학원 4차 학기였고, 학과 후배인 2차 학기 김영성, 이유종 그리고 1차 학기 조명수와 더불어 이 사진공방을 운영했다.
포토셀이 만들어진 것은 앞서 언급했던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석사 과정자답게 제대로 사진이론공부를 해보자는 뜻이었고, 하나는 이렇게 공부한 지식을 새롭게 사진의 길을 들어선 사람에게 제대로 한번 가르쳐보자는 뜻이었다. 물론 첫 번째 이유가 포토셀이 나타난 큰 이유였다. 홍대 대학원은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는 척박한 교육적 환경이었다. 야간에 개설된 특수대학원이었기에 전용 강의실 하나 없는 열악한 시설이었다. 또 상당수 학생들이 학문연구보다는 졸업장을 위해 다녔기 때문에 전혀 면학 분위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대학원에서 심도 깊은 학문 연구를 염원한 학생들은 학교 주변에 작업실 개념의 공부방을 마련하고 싶어 했는데 포토셀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공방을 통해서 학문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보자는 취지였다.
포토셀은 1년 반 정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지탱할 수 없었다. 많지 않은 운영비지만 수입원이 전혀 없었고 그나마 도움을 주었던 동료들이 학위 과정을 마치고 떠나갔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포토셀은 딱 한번 운영비 마련을 위해 사진 워크숍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바로 1987년 <포토셀 여름 사진 워크숍>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프로그램이었으나 그때는 학생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한번 가르쳐보자는 생각에서 사진학, 사진사, 사진화학, 사진기계학, 작가론 등 그럴듯한 모양을 갖춘 아카데미 사진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주형은 그때 만난 수강생이었다. 9명의 워크숍 수강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출신으로서 사진동아리 "하이포"에서 활동을 했으나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해보고자 포토셀을 찾았다. 이주형 말고 또 한사람 열정적인 학생이 있었는데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정현자이다. 이주형은 그때 말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때도 차분하고 조용했다. 과연 연극영화를 전공했을까 싶을 정도로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다. 그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 무더운 여름이었는데도 12주 코스를 끝까지 마쳤다. 수업 중에 인상적인 질문을 했다는 기억은 없다. 하지만 사진을 학문으로 다가서려는 진지한 학구파의 모습이 지금도 새롭다.
이후 우리는 상당기간 동안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를 다시 보았던 때는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흐른 1991년 봄 신사동에 위치한 사진교습소 "거울과 창"이었다. 거울과 창은 당시 돈벌이를 위해 만든 나의 무허가 사진학원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했으나 사진으로 아무런 일도 못하고 단 돈 일원도 수입이 없었던 때라 배운 지식을 활용하여 입시지도라도 해보겠다는 생각에서 사진가 박진호와 함께 신사 전철역 부근 놀이터 언저리에 만든 사진 교습소였다. 그러나 내게는 그곳 "거울과 창"이 "포토셀"에 이어 두 번째 지식의 터전이었다. 또 유학의 꿈을 키운 열정의 무대이기도 했다. 어느 날 "거울과 창"에 이주형이 낯선 청년과 함께 찾아왔다. 그때의 낯선 청년이 바로 사진사 분야에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는 사진이론가 이경민이다.
두 사람에게 사진이론을 가르쳤다. 모두 명석했기에 공부하는 자세로 강의를 진행했다. 둘 다 조용하고 신중했다. 그들은 한양대 사진서클 "하이포" 선후배 관계였다. 선배 이주형이 정서적이고 포용적이었다면 후배 이경민은 이성적이고 비평적이었다. 우리는 서로 선생, 제자 사이가 아닌 선배, 후배 관계로 학문의 우애를 다졌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때 이주형의 사진을 딱 한 차례 본 적이 있다. 야트막한 건물이 있는 변두리 풍경의 흑백사진이었다. 사진은 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가 기억할런지는 모르지만 사진을 보면서 으젠 앗제를 말해준 기억이 있다. 그의 사진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게 없다. 요란하지 않은 조형, 시간성이 묻어나는 감각적인 사진이었다. 그는 자신의 음색을 갖고 있었다. 안온하고 편안한 회고적 이미지였다.
수업은 반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교습소 문을 닫아야 했고 나중에는 남의 학원을 빌려야 했다. 우리는 또 다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이주형이 홍대 대학원에 진학 했을 때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내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왔을 때는 그가 유학을 떠났다. 우리는 평론가와 작가의 관계로 만나게 되었다. 그는 성숙한 작가로 성장해 있었다.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는 작가로 자리했다. 서로 사진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지만 그는 개성있는 작가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우리가 깊은 대화를 나눠본 것은 2001년 하우아트 갤러리의 <앗제가 본 서울>이었다. 나는 기획자로서 그를 초대했다. 사진의 코드가 앗제의 사진 코드와 유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진이 앗제의 세븐 앨범 카테고리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을, 기억을, 존재의 부재를, 그리고 그 부재를 환기하고 있었다. 그의 사진은 사라질 역사, 사라진 역사 이미지를 이야기했다. 나는 그것들을 보았고 그의 독특한 음색과 시선이 "앗제의 시선이 되어 바라본 서울 이미지"에 더할나위 없이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그의 사진세계를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의 사진적 음색 침잠하는 침묵의 이미지, 무엇보다도 정적의 뜰 안에 뿌려진 회상적 분위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 이것들이 사진적 강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또 컨셉이 분명했기에 흑백이건, 컬러건 색깔이 분명히 드러났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고, 또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성격이 분명한 사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따금 그런 내면으로 흐르는 서정적 이미지, 침묵과 정적을 즐기고, 또 지나간 시간의 공명을 더듬는 회고적, 서정적 이미지가 진부함과 단조로움을 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사진은 개성 있는 색깔, 그만의 독특한 음색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자신의 색깔을 견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나치면 "지루하다"는 소리를 듣고, 변화가 심하면 "가볍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주형은 변화하되 일관성 있는 자기 색깔을 보여준 작가였다.
최근 변화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표현 영역이 넓어지고 매체로서 사진에 대한 인식도 이전에 비해 달라졌다. 아마도 사진의 새로운 시대적 환경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그는 시간성과 역사성을 주요 키워드로 삼는다. 또 시간 안에서 삶의 단상과 현대적 풍경에 천착한다. 최근 그는 사진에 대한 이야기보다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부쩍 한다. 또 한국사진의 부실한 인프라와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한다. 그때마다 그가 보여주는 진지함과 사려 깊은 태도에 놀라게 된다. 작년 9월 현대사진연구소를 출범할 때 그에게 맨먼저 협조를 구하고 조력자가 되어주기를 희망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조용하고 사려 깊다. 또 세밀하고 부드럽다. 그의 작가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늘 진지하고 생산적인 사유에 대해서 감동한다. 예측할 수 없는 한국사진의 제 문제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함께 사유할 수 있는 끈끈한 동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