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에 갇힌 남자
윤규홍 | 예술사회학
이 글이 간단한 전시서문이란 점에서 여러분에게 양해를 구한다면, 다음과 같이 본격적인 비평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지인 비평부터 한 마디 해야겠다. 확실히 그는 집 바깥보다 집 안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많은 이들이 사진가에 대해서 가지는 낭만주의적 예술가 상은 이것저것 넣을 수 있는 만능조끼에 투박한 구두와 가방이 포함되는 옷차림이다. 하지만 난 사진작가 이주형으로부터 그런 모습을 그려내기 힘들다. 이창(Rear Window.1954)의 주인공 제프리를 닮은 남자란 뜻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는 스튜디오와 강의실과 카페테리아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작품을 보면 작가는 언제나 실내에서 야외를 찍었다. 창틀이나 햇빛가리개의 틈 사이로, 혹은 엷은 질감 속에 어른거리는 바깥 경치가 이주형의 사진 속에 항상 등장했다. 그 사진은 아름다웠다. 그는 “Landscape"라는 표제를 붙이고 모든 자연의 매혹을 격자(grid)의 가로세로로 그은 개념적 직선 안에 집어넣는 기획을 시도해왔다.
이번에 갤러리 분도에서 공개되는 새로운 작업 <LF> 즉 Light Flow는 조금 다르다. 전체 형식은 이전과 같은 식으로 가닥이 잡혀있다. 실내에서 바깥을 향하는 시점을 두고, 그 사이에 격자 구실을 하는 대상을 사이에 둔 채 안과 밖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조합해서 심도와 색상을 조정하는 과정은 같다. 그런데 최근작은 카메라가 응시하는 목적지가 창 너머에 펼쳐진 대상이 아니라 그 경관을 거의 막고 있는 블라인드다. 이제 멀찌감치 굽이치는 산세는 최소한의 실루엣으로 존재하거나 혹은 이마저도 볼 수 없게 된다. 남은 것은 빛이다. 적어도 그의 신작은 그렇다.
가리개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가 된다.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이 말했나, 아니면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re)가 그랬나. ‘모든 음악에서 고요함이란 연주가 끝난 다음에 찾아오는 침묵에서만 가능한 것’이란 말을 누가 했다. 소리와 침묵의 변증법은 빛과 그림자의 관계에도 곧장 대입된다. 이주형은 예전부터 이 같은 그림자를 매혹적으로 표현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욱 단순하게 빛의 반대편을 화면에 채운다. 우리는 빛을 실제로 볼 수 없지 않나. 가시광선은 무엇을 보게끔 하는 매체(media)일 뿐이지 그 자체가 시각의 궁극적인 대상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주형의 작업처럼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그 빛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이 빛이 예컨대 감방 안으로 내리쬔 신영복 선생의 빛처럼, 자유나 계몽주의 혹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해석하게 되는 상징과 비유는 일단 여기서 빼자. 그것까지는 난 모르겠다. 작가는 자기 작업 속에 품은 빛을 ‘카메라라는 기계의 힘을 빌어서 생체 감각의 차원으로 침투시키는 빛의 이미지’란 뜻으로 자신의 작업 성격을 밝혔다. 우리는 그 말을 따른다.
붙잡아둘 수 없는 빛의 이미지를 그가 애써 보여주려는 이번 시도가 내 생각으로는 얼마간의 위험부담(lisk)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처럼 강렬한 빛의 포획은 그 나머지의 흔적 속에 그동안 작가가 다듬어왔을지도 모르는 내러티브를 멈췄다. 하지만 이 멈춤은 이를테면 포기나 기각과는 다르다. 차라리 이건 반복에 가깝다. 이번 전시에서 배치된 작품의 맥락을 살펴보면 된다. 그리 멀지 않은 예전에 완성된 작업과 새로 드러난 작업의 병치는 그 이미지의 차이가 실은 무엇을 반복해서 보여주려고 하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그 무엇이 정확히 어떤 건지에 관해서는 내가 적어도 이번 전시의 기획자 입장이라면 작가와 더 성실한 대화를 했어야 됐다. 그냥 내 추측으로, 그가 작가적 이력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우리 시각의 인지 체계에 유사하게 대비되는 사진기의 작동 원리, 그리고 이 둘과는 또 다른 수준에서 흘러가는 현실 속 시간과 공간이다. 정리하자면 유기체적 영역, 기술적 영역, 문화적 영역의 세 가지 차원에 대한 작가의 발언이 아닐까.
말이야 쉽지,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그림인지 사진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참 애잔하게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일반적인 감상평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화면 속에 별다른 알레고리나 상징 장치를 두지 않았다는 면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시간도 공간도 모호하다. 단지 드러나는 반복되고 정리된 이미지가 있을 뿐이다. 작가는 단지 한 명의 일차적인 관찰자 또는 목격자이며 내러티브를 이끄는 화자의 위치로부터는 스스로를 차단시킨 채 사진 화면의 옆으로 비껴나 있다. 이 세상의 어떤 부분에 관한 재현으로부터 출발한 이주형의 작업은 격렬한 카타르시스나 프로파간다 등으로 보는 이들의 감정이 수직 상승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가 이곳에 강박적으로 펼쳐놓은 이미지는 작가 이력에서 지금껏 고안해 본 방법으로도 개운하게 포착되지 않은 것, 예술과 교육의 장에서 다양한 언술로도 전달할 수 없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조차도 완전한 노출이나 배려를 자제한 채 자신의 미적 질서 속으로 되먹임하는 원칙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라. 그게 이주형의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