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현혜 <작가 인터뷰> 사진예술 2016년 10월호

<사진예술 2016년 10월호>

Light Flow 이주형

석현혜 기자


어둠 속에서 신의 모습은 단일하지만, 빛 속에서는 신의 모습이 다양하다.

In darkness the One appears as uniform: in the light the One appears as manifold.

- 타고르, 길 잃은 새 中

 

이주형 작가의 개인전 <Light Flow>가 대구시 중구에 위치한 갤러리분도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신작 시리즈는 빛 자체가 아니라, 가림막을 통해 번지는 빛의 자국을 사진으로 담았다. 1,2층으로 나눠진 전시장에는 총 16점의 작품이 걸려있는데, 전시 공간 안에 새로운 창을 내듯이 계산된 구도로 배치돼서, 그 자체가 가시화된 빛의 체험 공간이 된다. 각 작품들이 개별로 존재하기 보다는, 서로 짝을 이루면서 걸려있는데, 특히 시간의 흐름에 따른 빛의 변화를 다운 연작 사진들이 나란히 걸려있어 대조를 이룬다. 그의 작품에서는 빛의 자국과, 빛의 변화, 또 가림막을 앞뒤로 한 외부의 빛과 내부의 빛이 서로 다르게 짝을 이루고 있다. 그 미묘한 차이에 따라서, 빛과 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찬찬히 감상하는 즐거움을 준다. 

 

이전 작업에서는 격자와, 가림막, 외부 풍경 등이 많이 담겼다면 이번 신작에서는 가림막과 빛에만 집중한 느낌이다. 변화한 이유가 있는가?

  이 작업은 2013년부터 4년 정도 해오고 있다. 이전 시리즈는 근대공간을 담는 작업을 했는데, 작업을 하다 보니 건축공간 안에 있는 빛에 주목하게 됐다. 작업은 처음 문제제기했던 데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건축물의 안은 사회문화적 컨텍스트로 집약된 문화공간의 실내이고, 밖은 자연으로 이를 대비함으로써, 그 사이에 하나의 Grid(격자)를 넣고, 이 안과 밖의 대비를 강조해 보여주려던 것이 원래 시작이었다. 

  그런데 작업을 하면 할수록, 안과 밖의 접점, 그 자체와, 그 접점에서 보이는 빛의 자국에 더 빠져들게 됐다. 주로 특별한 장소를 찾아다니기보다는, 일상에서 머물렀던 공간에서 스케치를 하다가 그 중 내가 생각하는 그림에 부합하는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촬영했다. 카메라를 세워놓고 몇 시간을 관찰하고 기다렸다가 계속 찍다보니 변화가 나타났다. 

  지금 이 작업에서 격자 형태, 블라인드 형태로 등장하는 가림막은, 무대나 공연예술에서의 무대장치의 역할이다. 정작 주인공은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의 실루엣이나, 가림막에 비추는 야경의 불빛 등, 이런 빛의 자국이 주인공이 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벽과 밤이 완전히 다른 빛의 자국을 만든다.  

윤규홍 아트 디렉터가 쓴 이번 전시의 서문에는 ‘집 안에 갇힌 남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작업 방식을 들어보니, 그 말 그대로 창문 안에 갇혀서 작업한 것 같은데?

  내가 좋아하는 작업과, 스스로 충족감을 느끼면서 지속할 수 있는 작업 방식은 좀 다르다. 나는 권부문 작가의 작업을 좋아하는데, 일상적으로 접하지 못하는 장소, 특별한 장소, 특별한 시간- 세상과 대면하고, 찾아 헤매는 작업을 좋아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학에 몸담고 있어서, 그런 작업을 하기에는 여건이 제한적이다. 다만 이번 ‘Light Flow’ 작업을 해가면서 점점 같은 장면을 빛의 변화에 따라 반복적으로 촬영하고, 시간의 변화에 따라 스타일을 비교하며, 스스로 즐기게 됐다고 할까. 그 기다림의 시간들을 좋아하게 됐다.

  어쩌면 나에게 더 맞는 작업방식일 수도 있고, 이 작업을 해가면서 작업이란 정말 개념적으로 명료하게 떨어지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실감하니까. 명료하게 떨어지고, 정리된 것을 원한다면 논문을 쓰지.(웃음) 결국 작업이란, 어떤 문제제기를 던져놓고, 시각적으로 풀어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변수들, 지속하며 나타나는 충돌의 결과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작업에는 어떤 변수들이 있었는가?

  박사논문 주제가 안드레아 구르스키였다. 구르스키의 작업은 얼핏 다큐멘터리 사진 같지만, 실상은 다 만지고 조작한 결과물이다. 디지털 변용의 측면에서, 우리가 보통 사진을 두고 현실의 자국이다, 인덱스다 그렇게 필름 사진을 두고 말하지만, 필름 그 자체도 현실 있는 그대로는 아니고 결국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그냥 변형된 것이다. 컬러사진이나, 흑백사진들도 현실을 거쳐 고착되지만, 그 자체가 현실의 요소는 아니다. 네가로 찍으면 플랫하게 나오고, 슬라이드도 과장되고, 그런 기준이 있으니 현실 그 자체는 아니란거다. 오히려 디지털로 작업해서 고해상도로 디테일을 살릴수록, 그 과도한 실재감이 관객이 지각하는 수준을 넘어설 때, 상이한 감각을 준다. 

  가령 이번 시리즈 사진 중 하나는 캔버스에 얹혀 놓은 것 같다는 감상을 많이 들었다. 가림막의 질감이 극사실로 묘사되니까, 그런 착각이 나타나는데, 이처럼 과도한 실재감이, 내 관심과 의식의 반영되는 지점이다. 내가 가졌던 기준은 가림막이 있다면, 빛이 닿아서 어떤 자국을 만들고 있는데, 사실 일상에서 관찰하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 과장해야만 그게 느껴진다. 디지털 작업을 통해서 그림자나 이런 것들을 조금 강조해 냈다. 

  안드레아 구르스키 작업에서처럼, 재현이미지가 일반적인 감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넘지 않게, ‘이것은 가공된 것이구나’라고 직접 다가가지 않도록 신경 썼다. 빛을 머금은 디테일들이 강렬하게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게끔 했다. 각 장소의 안과 밖, 조명의 차이, 조도의 차이, 톤의 조절 등은 그대로 유지해서, 이를 통해 드러나는 빛의 자국들을 강조했다.

전작에는 가림막 너머, 투과되는 풍경을 보여주었다면, 이번에는 은근하게 숨겼다. 왜 빛 그 자체에 주목하게 됐는가?

  가림막이 무대 장치같이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요소를 부여하고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냥 지나치지 않고 좀 더 오래 이미지 앞에 머물게 하고, 그럼으로써 빛의 자극을 의식하게 만들기를 바랬다. 그런 빛의 자국이 관객으로 하여금 평소에 의식하지 못하던 빛의 감각을 일깨우게 하도록 말이다. 결국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빛인데, 빛은 보이지 않고 머물렀을 때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작업을 하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이미지 앞에 섰을 때 마치 빛이 나에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관객이 느끼기에 빛의 감각에 대해 각성함으로써, 평소 느끼지 못했던 현존의 감각 - 내가 여기에 있다는 고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두 가지 측면이 조금이라도 관객에게 전달되면 의미가 있다고 본다. 

빛의 감각을 각성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안드레아 구르스키의 작업을 두고 여러 리뷰가 있는데, 그중 하나 좋아하는 리뷰가 있다. ‘구르스키 작업은 일단 거대하고, 시점을 이쪽에서 바라본 것과, 저 쪽에서 바라본 것의 소실점이 다르다. 때문에 관객은 거대한 작품 앞에서 대상을 바라보지만, 원근법이 교란돼있어서, 시각주체로서 시선이 닿지 못하고, 이미지의 표면 위를 시선이 부유하게 된다. 동시에 거대한 작품 앞에서 한 발자국 옮기면서, 그 교란되는 시선이 현상학적인 신체, 눈으로 보는 이미지가 아닌, 몸으로 보는 이미지가 된다’는 리뷰가 이 말을 정말 좋아했다. 구르스키의 작품을 눈으로 뭘 봤다가 아니라, 어떤 다른 감각의 차원에서 받아들인가는 말이다.

  관객에게 눈에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빛의 감각이라고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을 의도했다. 공간 구조에서 빛이 떨어지는 것들을 보며, 적절하게 빛의 감각이 관객을 휘돌면서 다가갈 수 있다면, 눈만이 아닌 신체, 피부에서 체험하는 작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관객이 내가 둘러싸여 있구나 느끼는, 현존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앞으로 계속 이 시리즈를 작업할 예정인가?

  이 작업의 주인공은 빛의 자국이었다. 다음 작업도, 어떤 매개를 통해서 빛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일깨워 낼 수 있을지, 다른 방식으로 그런 것을 시각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지 찾아보려 한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는 있는데 아직 구상 중이다.

교수이자 지도자의 일과, 작가의 일을 양립해가는 것은 어떠한가?

  작가는 자기 것만 이해하면 되고, 굳이 다른 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가르치는 입장이란 내가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동시대 예술사진의 쟁점과 경향을 다 알아야하고, 이런 것이 없으면 가르치기 힘들다. 나 스스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데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지 않나?

  또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만 집중해서,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부분이 필요하다. 하지만 좋은 교육자는 이타적이고, 작업을 두루두루 봐야한다. 좋은 교육자이자 작가를 병립한다는 것은 딜레마가 있지만, 결국 나는 작가는 ‘팔자’라고 본다. 어떻게 할 까, 고민하기 전에, 눈앞에 있으면 하게 되는 것이, 작가는 그냥 팔자니까.

  예술가의 문제해결 방식은, 어쨌든 지속적으로 내적동기를 찾아 헤맨다고 하지 않나? 작업을 하지 않는 고통이 최고조로 이르렀을 때 작업을 하게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