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18년 10월 11일>
이주형, '빛의 시선' 전
윤규홍 | 갤러리 분도 아트 디렉터, 예술사회학
학식이 깊은 분들은 평론에 맞는 글을 적절하게 인용한다. 난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오늘은 쓸 수 있다. 오후에 영화학 강의를 하면서 발터 벤야민이 썼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가르쳤던 게 머리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구가 있었다. “화가는 앞에 놓인 대상으로부터 자연스러운 거리를 유지하려는 반면, 카메라를 든 사람은 작업할 때 대상의 세세한 조직까치 파고든다. 화가가 완성한 이미지는 전체적인 상이며, 사진가의 이미지는 여러 개의 단편적인 상으로, 이런 낱낱의 영상은 새로운 원칙에 따라 다시 짜 맞춰진다.”
벤야민의 이런 분석은 80년 전에 나왔고, 시각 예술은 이후에 바뀐 것도 많다. 극사실주의 회화는 카메라의 힘을 빌려 기계보다 화가의 손재주가 여전히 우위에 있단 것을 뽐냈다. 모호한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 부분의 얼개에 얼마나 집착하는 추상단색화는 또 어떤가. 한편 사진 또한 더 이상 사진이 아닌 것 같은 뭔가가 되어버렸다. 물론 순전히 찍은 그대로의 상이 맺힌 사진만이 기록의 가치로 평가받던 시절 이전에도 예술로서의 사진을 시도한 최초의 움직임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픽토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딱한 사연이 깔린다. 솜씨가 그다지 없던 화가들이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서 이런저런 수를 썼다. 그들은 붓 대신 카메라를 들고 찍은 사진들을 겹치고 붙이고 여기에 또 붓질까지 더해서 사진인지 그림인지 분간이 안 가지만 좌우지간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던 노력이 있었다.
사진작가 이주형이 펼치는 세계 또한 계보를 따라가면 픽토리얼리즘에 닿는다. 그의 디지털 픽토리얼리즘은 모욕이 아니며, 그렇다고 뻔한 찬사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단색화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그림과 사진의 경계가 지워진 게 이주형의 작업이다. 이같은 그의 사진은 한국에서 거의 첫 번째로 손꼽히는 단계에 올라 서 있다. 작가는 빛의 몰입(Light Flow)이라는 제목을 붙이는데, 이유가 있다. 그는 창문 너머에 놓인 자연을 찍는다. 왜 창에는 저마다 블라인드나 커튼도 같이 드리워져 있지 않나. 이런 가림막 때문에 창밖 풍경은 희미하게 비칠 뿐이다. 그 모든 것은 햇살에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사랑하는 이를 대할 때 그를 둘러싼 희뿌염과 밝음과 보배로움이 하나가 되어 내게 다가오는 순간. 작가도 그런 순간을 맞기 위해 피사체를 앞에 두고 몇 시간 동안을 기다리며 빛의 조락을 살핀다. 시어적 표현이지만 그는 빛이 머금은 질감 안에 머문다. 그것을 몰입(flow)이라고 불러도 과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