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혜진 <photo, minimal 전시 서문> 2018년 12월

<photo, minimal> 전시 서문

갤러리 룩스, 2018

미니멀한 사진이란 무엇인가

문혜진(미술비평)

대략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누구나 알지만 정작 그 실체가 무엇이냐를 물으면 명확히 답하기 곤란한 개념들이 있다. 외형적 유사성은 존재하나 기원이 불분명하고 하나의 사조나 흐름으로 묶기에는 공통점이 없을 때, 보통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 미니멀 사진이라는 용어 또한 그러하다. 흔히 모더니즘 건축의 기하학적 파사드나 대상의 일부를 추상적으로 찍은 사진을 지칭하는 이 용어는 ‘미니멀’하다는 용어의 다의성이 ‘사진’이라는 특수한 매체와 결합하면서 그 모호성을 더하는 듯하다. 우선 미니멀이라는 의미부터 살펴보자. 어원적으로 미니멀은 최소화라는 뜻을 함축한다. 그런 고로 미니멀하다는 표현의 표면적 의미는 재료나 형태, 구성에서 단순화와 최소화를 추구한다는 뜻이고 그것이 단위 요소의 반복, 몬드리안식 대칭과 리듬, 기하학적 미, 추상성과 규칙성, 직선적이고 명료함 등의 외형으로 표출되며, 나아가 이와 같은 형식적 요소를 배태한 맥락(현대성, 모더니즘의 합리주의, 이상주의)과도 연계되는 확장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미술에서 하나의 사조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미니멀리즘’의 존재다. 도널드 저드(Donald Judd)와 모리스(Robert Morris)의 주도 하에 1960년대 중후반 태동한 미니멀리즘은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한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미국식 모더니즘의 계승이자 전복으로 태동했다. 아방가르드를 키치와 구분하기 위해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했던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은 미술적이지 않은 요소를 미술에서 제거하는 부정의 방법론으로 귀결되었고, 이는 캔버스 위에 발린 물감으로 상징되는 이야기와 형상이 제거된 추상 색면 회화로 형상화된다. 하지만 재현을 일으키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그린버그의 엄격한 청교도적 방식은 모노크롬 평면이라는 종착점 이후 나아갈 길을 잃게 된다. 저드가 “특수한 사물(Specific Objects)”이라는 회화도 조각도 아닌 제3의 개념을 제시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다. 실제 공간인 3차원의 사물은 환영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반(反)환영주의라는 모더니즘의 기치를 계승하면서도 회화의 사각 틀을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작가의 주관적 개입을 배제하고 구성의 위계를 없애려는 미니멀리스트들의 의도는 최대한 단일한 형태와 중심이 없는 병치(one after another) 구조라는 미니멀리즘의 외형적 형태를 낳는다. 단순한 큐브가 줄줄이 나열된 저드의 작업은 미술에서 형태적, 은유적 환영을 제거하기 위한 이론적이고 논리적 사유의 결과였으므로, 보통 단순히 기하학적인 외형과 결부되는 미니멀이라는 말의 통상적 사용과는 실상 상당한 거리가 있는 셈이다.

   이처럼, 가깝게는 단순성, 규칙성, 추상성, 반복 같은 외형적 특징에서부터 멀게는 사물성, 연극성, 현존성 같은 이론적 개념까지 확장되는 미니멀이라는 단어는 사진과 결부되면서 어떤 효과를 낳는가. 사진의 범주 또한 무한히 넓으니 어떤 사진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photo, minimal>(갤러리 룩스, 서울 2018)에 참여하는 김도균, 박남사, 이주형, 황규태의 경우 미니멀은 표면적으로는 추상이요 태도에 있어서는 보이는 것 너머의 어떤 근원을 추구함을 의미하는 듯하다. 여기서 미니멀은 대상을 재현한다는 사진의 본재적 목적을 넘어선 탐색을 뜻한다. 모든 사진은 원론적으로는 구상이다. 대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취하는(taking)’ 사진의 본성상 사진에 찍힌 모든 대상은 실재하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그렇기에 사진으로 비재현을 추구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모순을 동반한다. “모노크롬 사진은 현실의 추상이며, 실재와 추상이라는 모순되는 두 항이 혼재하는 역설의 이미지”라는 박남사의 말처럼, 재현 너머를 추구하는 사진은 구상이면서 동시에 추상이기에 자신의 기원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 초월의 의지이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사진의 경계를 넓히는 매체 탐구가 된다. 이들 사진가들은 모두 카메라라는 장치를 통해 육안으로는 불가능한 추상적 이미지를 도출해낸다. 때로는 점, 선, 면이라는 기본적 조형 요소의 구성미를 탐색하기도 하고, 재현과 비재현, 표면과 깊이의 공존을 탐구하기도 하며, 시각성을 넘어 촉각적이고 물질적인 경험을 유발하거나, 아예 21세기 이미지의 기원인 픽셀의 세셰로 빠져들기도 한다. 이때 비재현적인 어떤 속성을 도출하는데 카메라와 사진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가 각 사진가의 작업을 해석하는 핵심이요 <photo, minimal>에서 ‘미니멀한 사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이주형의 사진은 참여 작가 중 구상이라는 사진의 본성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작업일 테다. 가림막 혹은 블라인드의 일부를 확대해서 찍은 그의 사진은 적당한 정도의 클로즈업으로 인해 대상의 형태가 유지되며 피사체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는 세부(가림막을 올리고 내리는 볼 체인, 창문 틀)가 포함되어 있어 보는 자로 하여금 이미지의 출처를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의 사진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진가가 가림막을 가림막으로 찍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주형이 실체로서 가림막을 재현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진의 지향은 블라인드의 표면인가, 흐릿하게 드러나는 그 너머의 풍경인가, 그도 아니면 블라인드 너머로 스며 나오는 빛인가.¹ 초기의 사진이 바깥 풍경으로 대변되는 구상과 격자로 대변되는 추상을 비슷한 비중으로 공존시켰다면, 이번 전시에 출품된 근작들은 외부 풍경을 최소화하고 창틀과 블라인드가 만들어내는 기하학적인 리듬과 그 사이를 침투하는 빛의 자국에 집중한다. 일차적으로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화면을 분할한 격자 구성이다. 좌우 대칭을 이루는 크고 작은 직사각형들이 만들어내는 분할의 리듬은 몬드리안식의 화면 구성의 묘를 더한다. 이를 위해 사진가는 화면의 프레이밍, 빛의 점진적 차이에 따른 명암을 섬세하게 조율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격자가 질서와 반재현, 체계를 상징하는 모더니즘의 “침묵에의 의지(will to silence)”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를 열어젖히는 것이 이 사진들의 독특함이다. 이주형이 찍는 것은 “카메라라는 기계의 힘을 빌어서 생체 감각의 차우너으로 침투시키는 빛의 이미지”²다. 이주형의 격자들은 기하추상의 차가움이 아니라 마크 로스코(Mark Rothko)나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의 그림처럼 떨리는 빛의 진동을 전달한다. 창틀의 윤곽을 따라 떠오르는 초록색 십자가의 형상이나 투과되는 빛의 광량에 따라 짙어지는 노란색의 계조는 마음을 가라앉힌 평정의 상태에 도달할 때 얻을 수 있는 고요함과 명상의 느낌을 불러온다. 실제로 작가는 촬영 당시 자신을 고양시킨 신체적 감각과 현존을 일깨우는 광휘를 관객에게 전달하기를 의도한다.³ 공간에 둘러싸여 신체적으로 느낀 감각을 사진이라는 평면적이고 시각적인 매체로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디지털 작업을 통해 명암과 선예도, 채도를 강조한다. “디지털 변용을 통해 증폭된 빛의 질감”(작가)은 시각을 매개로 한 공감각적 환영을 일으킨다. 여기서 사진은 빛의 감각이 관객의 몸을 관통해 스며드는 촉각적이고 현상학적 체험으로 인도되는 초월적인 매체가 된다.

<중략>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느 범위를 넘으면 사진이 아니라고 할까. 사진은 사진이어야만 되는 것일까.”⁴ 어쩌면 황규태의 질문은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모두의 작업에 적용되는 핵심 논제일 것이다. 사진이면서 사진이 아닌 것, 사진 이후의 사진, 사진을 뛰어넘는 무언가는 사진의 전통에 발을 디디고 있되 21세기의 시각 환경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진가들 공통의 화두다. 실재를 내포하면서도 보이는 것 너머로 나아가는 미니멀 사진의 탐색은 그런 점에서 사진의 경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이 굳이 카메라를 경유할 필요가 없음에도 카메라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은 생각해볼만한 지점이다. 구상 이미지의 흔적을 남겨두고 있는 이주형을 제외한 세 작가들의 사진은 외견상 비(非)촬영 이미지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 중략 ···> 그럼에도 이들이 카메라라는 시발점을 벗어나지 않으려하는 것은 개념의 측면도 있겠지만 사진 매체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사진이 아닌 ‘이미지’를 이들 사진가들이 어떻게 수용하고 체화하는지가 향후 사진의 미래가 아닐까.

1 손영실, 「이주형 Light Flow」, 『월간미술』, 2016년 10월호, 172쪽

2 이주형 작가의 말. (윤규홍, 「집 안에 갇힌 남자」, 『Light Flow』, 갤러리 분도, 2016 재인용)

3 이주형 작가 노트, 2016

4 황규태, 『황규태』, 열화당 2005, 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