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익숙지도 낯설지도 않은 근대의 풍경, 자취 Vestige 서문> 2008년

익숙지도 낯설지도 않은 근대의 풍경

박성진 | 건축이론

예술은 일면 낯설음과 익숙함 사이의 문제다. 작가의 사물과 의식, 행위는 이 문제에 부딪히면서 예술의 지위와 그 좌표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현대미술은 익숙함보다는 낮설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이 중에서도 '탈문맥'이 주요한 형식으로 다뤄지고 있다. 탈문맥은 하나의 사물이 가진 영역과 경계를 훼손시키고 의미를 모호하게 해 그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놓는다. 뒤샹이 변기의 익숙한 조형을 낯설게 만들었던 것은 탈문맥의 조건에서 출발한 것이고, 이것은 사물을 넘어 의식과 개념의 문제로 미술을 끌고 들어왔다. 과거 모더니즘의 예술은 이 '낯설게 하기'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기서 되묻고자 한 것은 낯설음이 아닌 익숙함이다. 미술의 사조는 익숙한 것을 더 익숙하게-익숙한 것을 익숙지 않게-익숙한 것을 낯설게 등으로 이어왔다. 점점 낯설음이 미학적 수완을 발휘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낯선 익숙함이 좋다. 익숙한 것이 아름답다. 왜냐면 익숙함은 그 사람의 일상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좋은 이유가 그러하다. 배경음악 없이 흐르는 대부분의 장면들은 감정 몰입을 의도적으로 강요치 않고, 또 일상적 화면구성과 언뜻 상투적인 스토리는 영화라는 별개의 공간을 구축하지 못한 채 내 일상의 심연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그의 영화는 우리의 평범하고 건조하고 지루한 삶과 너무 닮아있다. '해변의 여인'이라는 영화 제목이 너무 진부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제 그 진부함과 상투적인 것이 좋아졌다."라고 감독은 답했다.

    건축물과 공간을 소재로 한 현대사진의 한 경향은 탈문맥적 상황을 통한 순수한 조형성과 이미지성의 표현이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군의 사진작가들이 순수에 매료되어 이미지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치밀하게 짜인 화면 구성 속에서 건축물의 입체는 화면을 채우는 평면적 이미지로 전환되어 표현된다. 건축물이 함의하는 인간사회의 역사와 문화, 시간성, 장소성은 탈색되고 건축은 순수 오브제로 등장한다. 익숙했던 일상적 공간과 콘텍스트는 저만치 물러나고 화면에는 우리의 일상과는 낯설어진 예술의 순수성을 간직한 오브제가 그려진다. 이는 매우 매력적인 사진임은 분명하다.

    이주형의 사진은 정면성과 이미지성을 피해가고 있다. 정면을 포착하더라도 그것은 순도 높은 이미지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간의 깊이, 시간, 기억, 장소를 담는 풍경이 된다. 이때 이주형의 사진도 홍상수의 영화와 마찬가지다. 낯설음이 아닌 익숙함으로부터 미적 체험이 야기된다. 우리의 내밀한 일상의 기억을 자극하는 보편적인 감성이 사진에 드러난다. 이주형의 사진은 역사라는 거대 사실을 내포하는 근대 건축물을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일상적 심리로 담아내고 있다. 상징화되거나 기념화되거나 과장되지 않고, 문맥을 벗어나지도 않는다. 달성공원과 놀이공원을 모노톤으로 찍은 이주형의 지난 작품에서도 장소와 그 역사는 미적 구도와 거대담론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개인의 낱낱한 기억과 일사에 스며들었다.

    이번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근대라는 시기 또한 이주형의 이런 특성과 어울리고 있다. 근대는 전통과 현재, 우리의 먼 과거와 오늘을 이어주는 가교로 볼 수 있다. 근대는 단절된 완료형 시제가 아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연속된 진행형의 시제이다. 하지만 우리의 근대는 불안하고 온전치 못하다. 그래서 근대는 우리에게 익숙지도 낯설지도 않은 시대이다. 근대에 대한 경험이 유년기의 기억으로 흐릿하게 남아있는 이주형에게는 더욱 그럴 수 있다. 타의적 수용과 질곡의 역사를 가진 근대의 건축물들은 이주형의 사진처럼 익숙지도 낯설지도 않은 풍경인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근대의 건축물들은 오브제로의 횡포를 포기하고, 일상적 시간과 의식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이는 혹시 그가 영화로부터 사진을 시작했기 때문일까?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공간성과 시간성이 그의 사진 작업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예술가는 누구인가? 실재의 형이상학 사이 어디즘에 서 있는 사람이다. 만질 수 있는 세계와 만질 수 없는 세계 사이가 예술가의 영역이다. 이곳에서 예술의 초월성은 결코 일상성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인 것, 익숙한 것이야말로 의식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보편성의 추구와 같은 야심은 가식이나 수사로 빠져 버리기 쉽다. 많은 예술가가 이 같은 오류를 겪는다. 다른 장르와는 달리 사진은 형이상학보다는 실재에, 만질 수 없는 세계보다는 만질 수 있는 세계에 근접한 예술이다. 사진은 본래 낯설음보다 익숙함에 충실했다. 하지만 사진이 예술적 지위를 확보하는 한 방편으로 낯설음에 관심을 돌린 지금, 이주형의 사진을 통해 역으로 그 같은 사진들이 얼마나 냉소적이던가를 알게 한다.